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은 폐가, 혹은 폐허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떠오르십니까? 아마 무섭거나 노후되었다 라는 느낌이 많이들 떠오르실 것 같습니다.

제 취미 중 하나는 폐허 탐험입니다. 국내외의 버려진 건물이나 방치된 지방, 재개발 지역 등을 주로 탐험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폐허 탐험을 취미로 삼다 보면 주변 지인들이 폐허를 찾는 이유를 종종 묻곤 합니다. 폐허 탐험도 탐험인 만큼 엄연히 목적이 있습니다. 공포 체험을 위해, 귀신을 찾기 위해, 침입자가 된 느낌이 좋아서, 혹은 자연이 인간의 흔적을 침식해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해방감이 좋다거나 하는 다양한 이유가 있습니다. 폐허 탐험에는 단순히 폐허가 좋아서, 폐허의 분위기가 좋아서라는 표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끌림이 있습니다.

제가 사는 마을은 서울 중심에 위치해 있습니다. 서울권 내에서는 그나마 개발이 덜 된 지역 중 하나였는데, 최근 들어 콘크리트 아파트로 둘러싸이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마을에는 십수년째 철골로 둘러싸인 채 방치 중인 2층 건물이 있습니다. 건물 자체도 눈에 띄지만 동네 어디서건 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지대에 있습니다. 저희 동네는 한 블럭 단위로 점집을 가리키는 깃발이 걸려 있을 정도로 유난히 점집이 많은 동네로, 타 지역 친구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저와 제 친구는 우리 마을에 수호신이 있고, 저 폐건물이 안테나 역할을 한다고 상상하고는 했죠. 점쟁이들이 계시를 받을 때 저 폐건물을 안테나 삼아서 하늘과 송수신하는 거라고요.

하지만 오래된 것들은, 제도권 앞에 그저 무력합니다. 올해 초, 저는 제가 살아온 마을이 곧 재개발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재개발 조감도를 보니 마을의 모든 풍경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예정이더군요. 좋아했던 거리도, 학교 일대의 풍경도, 자전거를 타곤 했던 큰 거리도. 높은 콘크리트 건물로 뒤덮여 버립니다. 기존의 그 어떤 역사성도, 현재성도 보장해주지 않는 도시 개발. 조용할 날 없었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동네 아이들의 웃음 소리는 이미 끊긴지 오랩니다. 추억 속 마을의 잔해 위에 다시 세워질 마을, 새로운 거리와 골목 풍경이 다시 아이들의 놀이 공간이 될 거라는 기대를 품고 싶지만, 당최 누굴 위한 개발인지 알 수 없는, 높은 콘크리트 아파트로 가득 메워질 재개발 조감도를 보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저는 영적인 것을 그다지 믿는 편은 아닙니다만, 오래된 것들에 의지가 깃든다는 내용의 괴담을 좋아합니다.

가령 버려진 가구나 인형같은 사물들이 원한을 품고 사람들을 저주한다거나, 100년 된 나무를 베어내고 건물을 지으려 했던 공사 관계자들이 차례차례 불운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들 말입니다.

이 존재들은 자신을 해치려는 것들 앞에서 무력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귀신 씌우고, 저주하며, 두려움을 조성하는 '불온한' 방식을 통해 자신을 해치려는, 외부의 규범적 폭력에 저항합니다. 버려진 사물들이 품는 저주는 그것이 있어야 할 장소, 존재 양식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한 것에서 오는 비탄 섞인 반항이다. 한 곳에 뿌리박혀 수십 년을 살아온 나무는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된 마을의 정서와 공간에 씌인 유령적 존재들을 대변하는 방식으로 외부 규범에 저항합니다.

저는 벨기에의 리에주라는 도시 외곽에 있는 거대한 폐건물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 건물은 세계 1차대전 이전에 지어진 건물인데 거의 왠만한 한국 대학교 부지만큼 거대한 군사 기지였습니다. 세계대전을 거치며 독일군에게 점령되고 40명의 벨기에인 학살 사건도 일어난 유서깊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폐건물이 되어 그대로 버려져 있었습니다. 저는 이 건물으로부터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마 위치 상 군사 기지로서 제대로 된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버려졌을 거라고 추측되는데요, 저는 이 200년 된, 역사적 유물이 되지 못한 채 버려진 건물에서 모종의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이 거대한 시간이 켜켜이 쌓인 공간이 내게 무언가를 전하려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폐허 특유의 차가운 느낌. 무거운 분위기. 몸에 스며드는 습기. 먼지와 곰팡이 핀 냄새. 유령의 흔적들이 자아내는 으스스함. 저는 유령적 감각이 단지 영적인 것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미적 체험, 이러한 시공간적 제약을 넘어서는 공간적 체험이 곧 유령적 감각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소외된 공간, 폐허가 된 공간, 방치되고 버려진 공간, 변두리 공간이 자아내는 시공간적 체험에 대한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제가 추억하는 마을 풍경이 곧 사라진다는 것에 슬퍼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로 갈아치워지는, 낡고 노후되었다고 규정된 공간들이 저주하고 귀신 씌우고, 사회적 규범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그들에게 다시 되돌려 주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 이 상주시 캠프가 제가 하려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상주시로부터 도시 생활의 충격과 복잡함 이면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다시 재고할 수 있는 힘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도심과 변두리를 나누는 사회 규범을 재고할 수 있게 만드는 연대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도시에서 제가 하려는 작업들은 취약하게만 느껴져 망설여졌는데 여기서라면 순조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언젠가 폐허에 대한 작업을 하게 되리라는 예감이 있었지만 섣부르게 시작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미루어 왔습니다. 폐허 탐험이 취미라고 밝힐 때마다 주변의 미온적인 시선을 항상 느껴야 했기 때문에 이를 작업물로서 다루는 것 역시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각적인 매체보다는 공간 탐험을 할때에 공기와 온도 등의 촉각적인 느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에세이와 공간 탐험을 바탕으로 한 사운드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이번 상주시에서 진행할 프로젝트는 그 다큐멘터리를 위한 초안 글쓰기입니다. 총 두 편의 글을 쓸 생각입니다. 벨기에 샤르트뢰즈 요새 탐험에 대한 글과 상주시에서의 교외 체험에 관련된 글인데, 두 글 모두 교외 지역에서의 감각적 체험을 다루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내용은 체험과 에세이를 바탕으로 한 문학적 실험과 공간과 도시 문화에 대한 이론적 글쓰기의 중간 형식이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감사합니다.

(첨부된 사진 중 5번째부터는 2기 캠프때 상주시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폐허의 유령들 첫날 프로젝트 발제문

첫날에 했던 프로젝트 소개 발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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