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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유령들 02 |
폐광의 역사관과 무너져가는 것의 존엄성

발제문

이주미

안녕하세요. 저는 강원도에서의 탄광 투어와 상주시의 폐탄광을 탐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화석과 폐허의 역사관에 대한 학술적인 글을 썼습니다. 제가 쓴 글,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기준에서도 좀 어려운 편에 속하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해설을 곁들인 발제를 한번 준비해 봤습니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하니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발제 중간에 어렵거나 궁금한 내용 있으시면 언제든지 질문 주세요.

글은 세 파트로 나누어지는데, 강원도 태백시에서의 탄광 투어에 대한 에세이, 화석의 역사관과 폐허의 역사관에 대해 개인적으로 분석한 이론적 내용, 마지막은 상주시 폐광 탐험에 대한 에세이로 끝납니다. 에세이 파트는 제가 글 내용을 읽어드리려고 하고요, 중간의 이론 파트가 어려울 수 있어서 사진 자료를 곁들인 해설로 대체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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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문화 소멸에 대한 무거운 글입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충격에 가까운 체험이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꽤나 불편한 경험이었습니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제게 지역 문화에 대한 관점을 달리 보게 만들었습니다. 사라진다는 것, 소멸된다는 것은 사실 마냥 나쁘게만 생각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에서 어떻게든 옛날 석탄 문화를 기억하고 기념하려고 애쓰는 방식도 그렇고요. 그런데, 사라지고 잊혀진다는 것은 정말 나쁘기만 한 현상인가요? 지역의 역사성은 반드시 보존되어야만 할까요? 이곳에서 이런 질문을 한다는게 꽤나 민감한 화제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한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공간들을 탐험하면서, 잊혀진다는 것에는 그 나름의 품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멸된다는 것은 과연 무력하기만 한 현상일까요? 쇠락과 쇠퇴의 과정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일까요.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선 (다소 뜬금없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석탄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석탄 하면 어떤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나요?

아마도 화석 연료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실 겁니다. 석탄은 태워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연료죠. 아니면 제가 방금 탄광에 대한 발표를 했으니 탄광 시설에 대한 이미지가 떠오르실 수도 있고요. 지역 문화나 노동 운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탄광 파업이나 탄광민들의 애환을 먼저 떠올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관점들은, 각기 다른 관점인 것 같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모두 인간적 관점이라는 것입니다. 화석 연료, 지역 문화, 탄광 시설, 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의 입장에서, 석탄의 이미지에 인간의 사상과 외부적 관점을 덧씌워서 석탄이 아닌, 인간의, 인간적인 다른 어떤 것을 연상한 셈입니다.

그런 것들을 지금은 일단 제쳐놓고, 석탄 자체에 대해서, 자연적 관점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석탄이 지구상에서 어떻게 형성되는 물질인지는 다들 아실 거라고 봅니다. 수천년 전의 고생대 식물이 오랜 세월 동안 압력을 받아서 형성된 유기 퇴적물이 바로 석탄이죠. 이 시커먼 돌덩이는, 엄연히 말하면 식물의 유해입니다. 죽은 식물이 썩고 수천 년의 시간에 걸쳐 석화된 생명입니다. 이 검은 돌덩이에서 식물의 흔적을 연상할 수 있나요? 다소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이런 화석들은 어떤가요? 이들로부터 생명의 흔적을 연상할 수 있나요? 충분히할 수 있겠죠. 적어도 생명이었을 적의 형상을 온전히 유지하고는 있으니까요. 그런데 여러분은 이런 화석들이 사실은 뼈가 아니라 돌멩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뼈는 엄연히 유기물이라서 아무리 길어도 천년 정도 지나면 썩어서 없어집니다. 그 뼈가 있던 자리에 다른 광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여 뼈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이 바로 화석입니다. 그러니까 얘네들은 그냥 돌덩이입니다. 화석은 더 이상 생명이 아니라 생명이 빠져나간 껍데기, 돌덩이에 불과하지만, 화석의 석화된 질감과 질료는 엄연히 생명의 기록, 자연사적 시간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화석이 아닌 광물도 자연 생명의 기록입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들을 저희가 평소에 잘 주목하거나 하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무늬와 흔적들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쌓인 지층과 암석 성분들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깎이고 무늬를 만들고… 바닥에 채이는 평범한 돌멩이들도, 우리 손 안에 있을때는 단지 굳어진 질료처럼 보이지만, 자연 활동들이 퇴적되고 박제된 역사적 이미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석탄의 이미지에서도 그런 자연적 시간을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들이 과거에 식물이었다는 건 그 형태만 보아서는 여전히 와닿지 않지만, 식물의 유해들이 얼마나 오랜 시간 압력과 에너지를 받았으면 이런 모양이 나올까, 그렇게 유추해 볼 수는 있습니다. 손 끝에서 바스라지는 시꺼먼 가루와 이상한 광택이 나는 석탄의 질감은, 다른 돌멩이하고는 차별화되는 이질적인 질감이 있습니다. 이 질감이 한때 이것이 유기물이었던 흔적을 미약하게나마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우리는 석탄의 질감을 통해서 어마어마한 세월의 흔적과 박제된 자연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도 사실은 유기물이잖아요. 흔히 땅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을 쓰는데, 우리가 종국에 다다를 역사적 말로가 어떠한 것인지도 석탄에서 연상되는 죽음의 이미지를 통해 어렴풋이 연상할 수 있겠습니다. 석탄의 이미지, 화석의 이미지는 죽음의 이미지입니다. 자연 속의 석화된 생명, 화석은 생명이 소진된 후 남은 질료의 껍데기입니다. 그 질료의 질감을 통해서 우리는 자연적 힘과, 한 때 생명이었던 것의 생동감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것이고요.

여기서 발터 벤야민이 제시한 자연사 개념과 연결해볼 수 있습니다. 17세기 유럽의 바로크 문학에서는 해골과 폐허의 이미지가 정말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해골 그림이 그려져 있는 한 바로크 시구에는 다음과 같은 캡션이 달려 있다고 합니다. "제왕은 몰락하고, 도시는 멸망하니, 옛날의 로마에서 남은 것이 없도다." 이 해골과 폐허의 이미지들은 사람이 죽어 석화되고, 썩어 없어지고, 건물이 파괴되고, 파멸하는 과정을 묘사하여 인간 문명, 세속적 역사관, 관점과 사상을 비롯한 모든 인간적 형성물의 유한함과 덧없음을 상기시킵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각상과 기념비, 탄광 시설과 같은 유적들이 마치 영원할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건물들이 인위적인 방식을 통해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건물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적 힘에 의해 저절로 부스러지고, 무너지고, 종국에는 그 형태를 잃고 잔해와 파편이 될 것입니다. 그 사라져가는 현상을, 마냥 슬프거나 무력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자연사는 자연의 역사를 뜻하는 용어입니다. 인간의 역사관은 마치 우리가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속할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하지만 자연적 역사, 돌과 땅에 새겨진 시간의 흐름과 석화된 생명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한시적이고, 일시적이며, 영원할 수 없다는 자연적 진리를 일깨웁니다.

2010년대 이후로 석탄은 환경 오염의 주범, 지구상에서 퇴출되어야 할 원료가 되었습니다. 이 사진이 제가 철암 투어 에세이에서 말했던 까치발집과 동상 사진인데요, 철암 지역도 어떻게든 탄광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시설 투어를 기획하고, 조형물과 기념관을 세우는 방식을 통해 스스로를 역사적 기억이 서려 있는 유적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폐허가 되지 않기 위해 인위적인 방식으로, 석탄에 다른 역사적 이미지를 덧씌우는 방식으로 유적지가 되는 것을 택한 겁니다. 하지만, 죽은 석탄이기에, 버림받은 물신이 된 석탄이기에, 저는 오히려 거기서 다른 가능성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버림받은 것들이 지니는 죽음의 이미지는 인간이 만들어낸 세속적인 역사관, 여러 사상들과 제도적 폭력, 인위적인 것들을 뒤엎고 전복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문에서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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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폐허 탐험의 촉각적 경험을 통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죽음의 이미지로부터, 우리들 인간 사회의 기존의 역사관과 이데올로기, 그러니까 우리가 사회에 얽매여 그동안 사고하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전복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폐허 탐험이 지닌 고유한 미학적 체험의 힘, 숨겨진 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마지막 세번째 파트, 상주시의 버려진 폐광, 태맥광산에서의 촉각적 경험을 탐험록 에세이 파트가 남았습니다. 글을 마저 읽고 발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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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폐허의 유령들 02 |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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